천 년의 초록, 오늘을 물들이다: 말차

  • 572호
  • 기사입력 2025.09.23
  • 취재 임지민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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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초록빛 거품 위로 은은한 쓴맛이 스며든다. 한 모금의 말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천 년 전 송나라에서 시작된 점차(點茶)의 전통은 일본에서 수행과 철학으로 정제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지금, 말차는 고요한 다실을 넘어 세계의 카페 거리와 디저트 가게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전통과 트렌드가 하나의 잔 속에서 교차하는 순간, 말차는 더 이상 특정 문화의 상징이 아니라, 세계인이 공유하는 감각과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이번 문화읽기는 말차의 기원과 효능, 그리고 글로벌 확산까지, 초록빛 여정이 그려낸 풍경을 따라가 본다.


▣ 말차의 의미와 기원 ▣

말차의 기원은 중국 송나라에 있다. 10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송대의 차 문화는 찻잎을 쪄서 말린 뒤 곱게 빻아 뜨거운 물에 휘저어 마시는 ‘점차(點茶)’ 형식으로 꽃피웠다. 이 시기에 차는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지식인과 승려들이 교류하고 사색하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원·명대 이후 중국에서는 차를 우리는 방식(잎차)으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분말차 문화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 에이사이(榮西, 1141–1215)


▲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


12세기 초, 일본 선승 에이사이는 송나라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차 종자와 함께 점차 문화를 전했다. 그는 『喫茶養生記(음차양생기)』를 저술해 차가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용을 강조했고, 이후 일본의 선원 사찰에서 차는 좌선과 수행의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16세기에는 센노 리큐가 등장해 말차 문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와(和)·케이(敬)·세이(清)·자쿠(寂)’로 요약되는 정신을 바탕으로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닌 철학적 행위로 재정의했다. 다실의 소박한 공간, 검박한 다완, 간소한 의식은 권력의 과시가 아닌 평등한 교류의 장을 지향했고, 그 중심에는 늘 말차가 있었다.

이후 말차는 일본 차도의 핵심으로 정착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짙은 초록의 물결은 과거 송대에서 시작된 문화를 품은 동시에, 일본에서 형성된 정신적 전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래서 말차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천 년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수행의 흔적을 간직한 문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 말차, 몸을 채우고 일상을 물들이는 힘 ▣


말차가 다시금 세계인의 눈길을 끄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안에서의 힘, 또 하나는 밖으로 번지는 확장성이다.

먼저, 잎을 갈아 만든 분말을 그대로 섭취한다는 점에서 말차는 다른 차보다 풍부한 성분을 품는다. 카페인은 뇌를 깨우되, 함께 들어 있는 아미노산인 테아닌은 마음을 가라앉혀 균형 잡힌 각성을 돕는다. 집중이 필요한 순간, 말차 특유의 차분한 에너지가 사랑받는 이유다. 여기에 항산화 물질인 카테킨까지 더해지며, ‘건강한 각성’이라는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 다만 시럽이나 우유가 들어간 음료에서는 이 장점이 희석될 수 있기에, 어떤 형태로 즐기느냐가 중요하다.


▲ 스타벅스 말차 라떼


▲ 킷캣 말차 맛


동시에 말차는 더 이상 다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카페 거리와 디저트 가게에서 말차는 새로운 얼굴로 등장했다. 스타벅스의 말차 라떼, 일본에서 세계로 확산된 킷캣 말차, 맥도날드의 우지 말차 프라페는 이미 글로벌 아이콘이 되었다. 교토의 이포도, 츠지리 같은 전통 명가가 정통의 맛을 이어가는 한편, 성수동과 홍대의 카페들은 ‘한정판 말차 디저트’를 내세워 젊은 세대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결국 말차는 두 갈래로 힘을 발휘한다. 한쪽에서는 몸과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는 전통의 음료로, 다른 한쪽에서는 현대인의 일상을 감싸는 초록빛 트렌드로. 전통과 현대, 건강과 미각이 하나의 잔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 세계로 확산된 말차 붐 ▣


▲ 뉴욕의 차차 말차 (Cha Cha Matcha)


이제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뉴욕의 ‘차차 말차(Cha Cha Matcha)’ 같은 전문 카페는 초록빛 라떼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아이콘으로 만들었고, 파리의 카페 거리는 인스타그램을 채운 말차 디저트 사진으로 붉은 와인 대신 초록의 물결을 자랑한다.

이 열풍의 배경에는 건강을 중시하는 글로벌 트렌드가 있다. 커피의 날카로운 각성에 지친 소비자들이, 보다 부드럽고 균형 잡힌 에너지를 제공하는 말차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비건’, ‘슈퍼푸드’라는 키워드가 더해지며 말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세련된 자기관리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말차 한 잔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정신과 현재의 취향, 그리고 미래의 식문화를 동시에 목격한다. 초록빛 거품은 더 이상 일본만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서울과 뉴욕, 파리와 도쿄를 잇는 공통의 감각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