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안부는 잘 지내고 있나요?
임희선의 『안부의 안부』

  • 572호
  • 기사입력 2025.09.23
  • 취재 이정빈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 조회수 1447

42명이 보내온 각자의 가장 오래된 편지를 모아서 엮었다.


『안부의 안부』에는 지은이 대신 엮은이가 존재한다. 엮은이 임희선은 사람들 품속에 잠든 가장 오래된 편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최고(最古)의 편지를 모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책은 그렇게 모인 편지와 사연을 엮어낸 프로젝트의 결실이자 유종의 미다.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의 스캔본들이 늘어선 이 책은 한 권의 소중한 손 편지 사진집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안부의 안부』는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편지를 깨우며 오래전 누군가가 나에게 안부를 물었던 편지에 잘 있었느냐고 다시 안부를 묻는 책이다.


손 편지가 지닌 다정함이란 발신인의 필체에 꾹꾹 눌러 담긴 마음일 것이다. 1949년에 시할아버지가 손자며느리에게 보낸 답서부터 2021년에 좋아하는 친구가 책상 위에 두고 간 고백 편지까지, 종이 위로 흘러넘치는 마음을 소개한다. 누군가의 기억 위를 함께 거닐어 보자.


| 1959 | 홍양선 & 이을순,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는 이 편지를 60년이 넘도록 보관해 왔다. 마흔한 살 무렵, 남편은 강릉에서 아내가 있는 부산으로 원고지 세 장을 꼬박 채운 편지를 보냈다. 답장을 잘 주지 않는 아내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 달라고 애타게 부탁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연애편지의 그것이다. 아내는 답장을 잘 하진 않았지만, 그날 강릉에서 먼 길을 온 편지를 긴 시간 동안 소중히 해 왔다. 손녀가 보내온 할아버지의 편지다.


신록이 점점 울창하여 가는 초여름인가 봅니다. 옷 무게도 나날이 무거워지니 더위가 점점 따라오는가 보지요. 아이들 데리고 혼자 고생이겠습니다. 모두 탈 없이 잘 있는지요. 나는 이곳에서 몸은 탈 없이 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의 소식을 모르는 것이 제일 걱정되는군요. 언제나 잔소리같이 편지에 말하여 왔지만, 집 소식을 자주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이들 데리고 집안일에 시달리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집을 떠나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좀 알아주었으면 하고 당신의 편지를 바랍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그 생각하는 마음, 생각할 수 있는 그 정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중략) 특히 편지 쓸 작정이었으므로 딱 한 잔만 하였지요. 이러고 보니 퍽 정성 많은 사람 같군요. 이런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란 보고 들어야 느끼고, 생각하여야 느끼는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상대방에게 그 환경을 느낄 수 있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하게 하여 주면 따라갈 것입니다. 편지도 자주 하면 더 생각하게 될 것이고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밤 두 시 되었으니 이만 줄입니다. 잘 있도록, 몸조심하세요.

4292년(1959년) 5월 26일 강릉에서


| 1991 | 임선아 & 김은희, 친구에게

풍문여자고등학교에 다니던 두 친구 사이에는 3년간 편지가 오갔다. 풍문여고 사랑의 우체통에 학년, 반, 이름을 쓴 편지를 넣으면 점심시간에 사랑의 우체부가 수신인에게 전달해 준다. 은희에게 선아는 처음에는 정체를 밝히지 않고 마니또처럼 편지를 보내다가 하나하나 힌트를 주면서 찾아내게 하는 신비한 친구였다. 둘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잔디밭에 누워 하늘의 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선아와 은희의 별을 담은 편지를 소개한다.


사실, 지금 펜을 들면 너무 비관적, 침체, 우울…… 세상에서 제일 큰 슬픔이 가슴을 누를 것 같아서 약간 망설였는데, 역시 너에게 쓰길 잘했어. 친구야, 그래서 친군가? (히~) 은희야, 넌 ‘오리온’을 사랑한다구? 난 기껏해야 ‘북두칠성’-국자 모양이라면서…-밖에 모르지만, ‘오리온’을 보면 알 거야. 네가 사랑하는 오리온이니까 난 안 봐도 좋은 거야.

은희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 어쩌면 초조하기만 하다. 그치만, 우리 서로에게 위로하면서 열심히 해 보자. 항상이지만 ‘열심히’란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애. 사실, 우린 지쳐 있는 게 아니라 발랄한 10대 아니겠니? 대학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게 놓인 꿈을 위해서 맘껏 날아보자꾸나. (나, 오늘 이상의 ‘날개’ 읽었거든. 히~) 그럼, 너의 건강을 항상 기원하며…

1991. 8. 30. 선아 보낸다.


| 1992 | 하현 & 노을, 친구에게

방송반과 문학반 활동을 하던 두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 친구로 알게 됐다. 2학년이 되어 반이 갈리자 누군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둘만의 교환 노트가 생겼다. 일주일 동안 빼곡하게 적은 노트를 교환하며 시시콜콜한 서로의 일상-어디에도 풀 수 없는 감정, 생각, 공상을 공유했다. 졸업 무렵 둘의 노트는 서른 권을 훌쩍 넘겼다. 둘이서 반씩 교환한 이 노트에는 하현과 노을의 10대가 오롯이 담겨 있다. 노을은 그 시간을 ‘그렇게 맹렬히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하고 표현한다.


나의 자랑,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분신

네가 있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성립되는 거고 네가 있어서 난 늘 든든해. 나의 큰 기둥이고 믿음이고 사랑인 너야. 바뀌려야 바뀔 수 없는 그런 그런 나의 든든한 버팀목… 그게 바로 너야? 너는 알까? 네가 내게 있어서 얼마나 큰 존재인가를.

소중한 사람아! 그건 보이지 않는 거야. 말하거나 쓰는 건 오히려 구차하고 때 묻게 하는 거야. 그래서 더 이상 소리 내지 않기로 했어. 그냥 느낄 수 있게 해 줄게. 느낄 수 있게… 느껴지니? 내 맘 알까? 이런 내 맘 너는 알까?

92. 6. 5.


| 1996 | 강명희 & 강문희, 동생이 언니에게

자매의 우정으로 아름답게 물든, 세 자매 중 막내가 맏이에게 보낸 편지다. 맏이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터울이 많이 나는 여동생들을 무척이나 예뻐했다. 동생들은 언니에게 그 자체로 보물이고 사랑이었다. 그러던 중 언니가 이른 나이에 사랑에 빠져,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게 된다. 남편을 따라 이천으로 멀리 떠나는 언니에게 중학교 1학년 막냇동생이 결혼식 다음 날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신혼여행 후에야 받아본 편지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게 됐다. 동생들도 언니를 많이 사랑했다.


내가 사랑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언니에게.

언니! 그동안 잘 있었어? 5일간 언니를 볼 수 없던 날들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지고 지루하기만 했어. 괌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태어나서는 외국이란 곳 처음 가보지?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어서 너무 좋았겠다.

결혼식장에서의 언니 모습은 정말 천사 같았어. 왠지 언니한테 가기가 싫었어. 혹시 울음이 터질까 봐. 내가 유아실에 언니 보러 가려고 했을 때 언니가 눈에서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을 봤어. 그래서 못 갔어. 날 보면 또 울까 봐서. 우린 너무나도 언닐 사랑해. 알지?

언니! 내가 보고 싶을 땐 Piano 패널을 쳐다봐. 울지는 말고 그냥 웃어버려. 사랑하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언니! 길게 쓰고 싶지만 더 쓰다간 나 눈이 퉁퉁 붓겠어. 미안해. 다음엔 더 길고 기쁜 일만 쓸게. 언니 사랑해 무지무지. (알지?) 형부한테 언니 잘 부탁한다고 꼭 좀 전해줘. 언니 눈에서 눈물 나오게 하면 나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이 편지에 온통 메울 수 없을 만큼 사랑해. 언니 안녕.

1996. 11. 6. 밤 10시 30분에

언니를 무지 사랑하는 명희가


지금, 당신의 가장 오래된 편지는 어디에 있을까?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을 빛바랜 편지의 안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