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역사를 찾아서

  • 기사입력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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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로고에 새겨진 숫자, 1398. 학생증에도, 정문에도, 심지어 각종 굿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네 자리 숫자를 보며 한 번쯤 이런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정말 우리 대학이 1398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학교라고?


조선의 성균관에서 역사를 시작한 성균관대학교는 올해로 건학 628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 나라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고, 성균관 역시 근대화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름과 교육의 형태를 여러 차례 바꾸었다. 그렇다면 1398년의 성균관과 오늘날의 성균관대학교 사이에는 어떤 역사가 놓여 있는 것일까. 그리고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성균관이라는 이름과 전통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그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우리가 익숙하게 마주해 온 ‘SINCE 1398’에 담긴 의미를 찾아본다.



| 성균관, 그 시작을 찾아서
‘성균관’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1398년보다 앞선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298년 국자감이 성균감으로 개편되며 처음 ‘성균’이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1308년에는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성균관은 고려 말의 교육기관을 이어받아 조선으로 계승됐으며, 한양 천도와 함께 새로운 터에 자리 잡았다. 특히 조선시대 성균관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성리학적 이념을 널리 알리고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그 위상을 확고히 했다.
조선의 성균관은 오늘날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인재 양성의 중심지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며 『논어』·『맹자』·『대학』·『중용』 등의 사서와 오경을 비롯한 다양한 경서를 공부했고,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학업을 이어갔다. 일정한 학업 성취와 출석이 요구됐으며, 성균관 유생에게는 과거시험에서 여러 특전이 주어졌다. 동시에 유생들은 재회를 통해 자치적으로 생활을 운영하고, 국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집단적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성균관은 단순히 경전을 가르치는 학교를 넘어, 조선의 지식인과 관료를 길러내고 이들의 목소리가 모이는 공간으로 기능했던 셈이다.
이러한 성균관이 한양에 자리 잡은 시점이 1398년이다. 조선 개국 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에 중앙의 국립 최고학부를 마련했고, 동북방 숭교방에 성균관을 세웠다. 1395년부터 시작된 건축을 거쳐 1398년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주요 시설이 갖춰졌으며, 현재 명륜캠퍼스에 남아 있는 문묘와 명륜당은 당시 성균관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보여주고 있다.
1398년은 ‘성균관’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해가 아니라, 오늘날 성균관대학교가 자리한 이곳에 조선의 성균관이 세워진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려에서 시작된 성균관의 이름과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졌고, 그 성균관이 자리했던 공간에는 오늘날 성균관대학교가 들어서 있다.


▲ 명륜캠퍼스에 위치한 대성전
(출처: [서울 문묘 대성전 정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격변 속에서 이어진 성균관
- 전쟁 속에서도 다시 세워진 성균관
조선의 성균관은 오랜 시간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기능했지만, 역사적 격변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성균관을 통째로 폐허로 만들었다. 대성전과 명륜당, 유생들이 머물던 동재와 서재까지 모두 불에 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조정과 유생들은 다른 무엇보다 성균관 재건을 서둘렀다. 1601년 대성전을 시작으로 동무와 서무,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차례로 다시 세워졌고, 이후 존경각과 정록청, 식당, 양현고 등 부속시설까지 복구되면서 성균관은 다시 제 모습을 갖췄다. 병기창도, 왕릉도 아닌 학교를 가장 먼저 복구했다는 사실은 조선이 이 공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이 시기 재건된 성균관은 예전의 위상을 그대로 되찾은 수준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지방 서원이 학문 연구와 과거 준비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성균관의 교육 기능은 서서히 약화됐다. 재정난과 당쟁까지 겹치면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성균관은 유학의 전통을 지키고 국가 교육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 조선시대 성균관의 강학 공간이었던 명륜당.전란 이후 중건된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출처: [서울 문묘 명륜당 정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근대의 문턱, 성균관도 변화를 맞다
19세기 후반 개화의 흐름이 거세지면서 성균관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됐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은 수백 년간 이어온 인재 양성 기능을 한순간에 잃었다. 이듬해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가 설치된 것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였다. 유학은 물론 본국역사·만국역사·본국지지·만국지지·산술 같은 새로운 과목까지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전통 교육기관이 근대 학제를 받아들이는 실험이 이곳에서 시작된 셈이다. 오랜 유학 교육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지식을 함께 가르치며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성균관은 관제와 교육과정을 개편하며 근대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기 위한 변화를 이어갔다. 1905년에는 관제가 개정되면서 박사직이 신설됐고, 1908년에는 경학 외에 새로운 학문도 교육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근대 대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었던 셈이다.

- 빼앗긴 교육의 자리, 다시 이어진 움직임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국권 상실과 함께 중단됐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하면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정지시켰고, 이후 성균관은 석전과 제향 및 재산 관리 등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성균관의 교육 전통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럼에도 교육 전통을 되살리려는 유림의 움직임은 이어져, 1930년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이 문을 열었다. 명륜학원은 1939년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에는 명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점차 학교의 틀을 갖춰갔지만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1944년 명륜연성소로 개편되며 다시 한번 좌절을 맞았다.

| 다시 찾은 이름, 성균관대학으로
- 광복, 성균관의 이름을 되찾다
1945년 광복은 성균관의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광복 직후 미군정은 1945년 10월 군정법령 제15호를 통해 기존 경학원의 명칭을 다시 ‘성균관’으로 변경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학원이라는 이름 아래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던 공간이 다시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동시에 명륜전문학교 역시 부활하면서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됐다.
성균관의 이름을 되찾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대학을 세우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에서는 성균관대학의 설립이 결의됐으며,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중심으로 대학 설립을 위한 준비가 본격화됐다.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 교육의 자리를 빼앗겼던 성균관이 광복과 함께 다시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고, 그 전통을 현대적인 대학으로 이어가려는 움직임이었다.

- 심산 김창숙, 성균관의 맥을 다시 잇다
심산 김창숙은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다. 성균관 유생 출신인 그는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등 평생을 조국 광복에 바쳤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면서도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그는, 광복 이후에도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헌신하며 유학자로서의 신념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실천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이어갔다.


▲ 심산 김창숙
(출처: 심산 김창숙 기념관)


그에게 성균관대학의 설립은 단순히 하나의 학교를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시대를 이끌 인재가 필요하다고 본 그는,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 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성균관의 학문 전통을 근대 고등교육 체제 안에서 되살리려는 그 노력은 1946년 9월, 학린사와 명륜전문학교의 병합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렇게 성균관대학이 문을 열었다.


▲ 1948년 초대 학장 취임 당시 단체 사진
(출처: 심산 김창숙 기념관)


한편, 심산 김창숙의 독립운동과 성균관대학 설립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난해 성균웹진 ‘커버스토리’ 575호에서 다룬 바 있다.
성균웹진 | 575호 | 커버스토리 | 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

성균관대학은 조선시대 성균관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학교가 아니었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대학의 형태와 교육 내용도 달라졌다. 그러나 성균관이라는 이름과 오랜 교육의 전통, 그리고 그 터전에서 이어져 온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학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후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과 대학원을 갖추었고, 1963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되며 현재의 대학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했다.



성균관대학은 설립 이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교육의 영역을 넓혀갔다. 학교의 모습과 교육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성균관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담긴 교육의 전통은 이어졌다. 오늘날 성균관대학교가 다양한 학문을 탐구하고 새로운 시대의 인재를 길러내는 공간이 된 것 역시 그 긴 역사 위에 놓여 있다.
1398년부터 628년. 성균관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SINCE 1398’이 단순히 학교의 나이를 나타내는 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안에는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시작이 있고, 근대교육으로의 전환이 있고, 시대의 격변 속에서 겪은 단절과 상실이 있으며,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이들이 폐허 속에서 다시 세운 성균관대학이 있다. 누군가는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학문의 뜻을 놓지 않았고, 누군가는 몸이 부서지는 고문 속에서도 지조를 지켰으며, 누군가는 무너진 나라 앞에서 다시 붓을 들어 대학을 세웠다. 성균관은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지만, 그 모든 순간마다 누군가는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학교의 로고에 새겨진 1398을 너무 익숙하게 바라본 나머지 그 숫자에 담긴 시간과 사람들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SINCE 1398’은 지나온 628년을 기념하는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내고 이어온 역사이며, 오늘 이 캠퍼스를 걷는 우리 역시 그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증거다. 1398년 성균관에서 시작된 긴 역사는 오늘, 성균관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페이지를 써 내려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성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균관대학교, 「성대역사 | 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