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능생: ‘신이형미도(新以形媚道)’의 도시산수
- 588호
- 기사입력 2026.05.26
- 편집 성유진 기자
- 조회수 237
글: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동양인에게 산수는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었다.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산은 기(氣)를 머금고 응축시키는 뼈대이며, 물은 그 기운을 순환시키고 확장시키는 흐름의 통로였다. 즉 산수는 단순한 시각적 차원의 경관에서 이해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의 흐름과 장소의 관계망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거 화가들은 이러한 산수를 통해 도(道)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현현한다고 여겼다. 박능생[충남대 회화과 교수]은 과거 도시와 산수를 분리해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유를 거부하고, 동시대성을 가미해 도시와 산수를 하나로 ‘묘합’한 ‘도시산수’의 정경을 그리고자 한다.
▲ <서울풍경도>. 화선지에 홍묵, 주묵. 139.5×205.
2. 동양산수 인식과 도시산수
동양의 산수에 대한 인식론적 성격은 중국 남북조 시대, 이른바 ‘와유(臥遊) 산수’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종병(宗炳)의 「화산수서(畵山水序)」에 나타난 “형상[山水]을 통해 도를 아름답게 표현한다[以形媚道]”라는 사유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회화 차원의 산수는 그 배후에 존재하는 우주적 질서와 기운의 흐름을 감응하게 만드는 통로이자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도(道)를 형상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였다. 과거에 이러한 산수는 도시[都城]와 일정한 거리를 둔 특화된 공간[혹은 장소]으로 존재하였다. 그것은 대부분 은일(隱逸)을 꿈꾸는 인물들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위해 찾아가는 공간이자, 공자가 말한 인자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즐겨 찾는다는, 이른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상대적으로 인간이 사는 도시공간은 세속화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 <서울풍경도>. 화선지에 홍묵, 주묵. 139.5×205.
3. 파노라마식 시선에 담긴 도시의 숨결
먼저 박능생 회화 창작의 중요한 특징인 파노라마적 시선과 화면 구성 및 부감적 시선의 결합은 도시를 개별 객체의 집합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건물과 도로 및 사람은 서로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며, 따라서 화면은 서양식 원근법처럼 단일한 중심에 의해 조직되고 구성되지 않는다. 관람자는 화면을 따라 이동하며 도시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도시 전경을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시간과 움직임이 축적된 과정, 기의 흐름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에 간화(看畵)가 아닌 독화(讀畵) 차원의 감상이 가능해진다.
북송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왕희맹(王希孟)의 〈천리강산도(千里江山圖)〉, 조선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와 같은 횡폭(橫幅) 형식의 그림들은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대자연의 웅장함, 그리고 감상자가 그림 속을 거니는 듯한 유람의 이동 시점을 제시한다. 박능생의 도시산수는 이러한 파노라마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중심과 주변,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의 위계를 약화시키고 도시를 다중의 흐름과 리듬이 공존하는 열린 구조로 드러내며 도시 전체를 하나의 관계망으로 조망하게 한다.
부감적 시선은 곽희(郭熙)가 말한 삼원법(三遠法)의 심원(深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기술적 시점이 아니라, 세계를 전체성과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관조의 시선에 가깝다. 부감법에 의해 빌딩은 산맥과 같은 구조로, 도로는 강과 같은 흐름으로, 사람과 차량의 이동은 기(氣)의 순환처럼 읽힌 도시는 산수적 생태계로 재구성된다.
결국 파노라마와 부감의 결합은 도시를 하나의 통합된 산수적 질서로 전환시키며, 그 결과로 잉태된 도시산수의 정경은 그 공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탐색하는 시각적 사유로 확장되고, 이에 도시산수는 전통 산수화의 인식 구조를 현대 도시 환경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동시대적 의미도 획득하게 된다.
▲ <남산에서 점프하다>. 화선지에 수묵담채.74.5×106
4. 번지점프를 통해 본 도시산수의 속살
파노라마와 부감법을 통한 시선은 자칫 도시산수 공간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을 소외시킬 위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박능생의 도시산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번지점프’를 통한 ‘도시산수의 속살과 숨결’을 보고자 하는 ‘신진경도시산수’ 차원의 예술정신이다.
번지점프 형상은 부감법으로 조망된 자연 정경이나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진 풍경으로만 인식하지 않겠다는, 작가가 지향한 예술정신의 상징에 가깝다. 자신의 몸을 심층적으로 투영하는 번지점프 형상은 도시 공간을 신체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드러내는 시각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도시를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신체가 시각과 감각으로 경험하는 장으로 전환시키려는 작가의 시각적·인식론적 전환을 반영한다.
동양회화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번지점프 장면은 북송의 곽희(郭熙)가 『임천고치(林泉高致)』 「산수훈(山水訓)」에서 제시한 ‘산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노닐며 즐기는 차원인 ‘가유(可遊)]’와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멀리서나마 산수의 웅장함을 바라보며 즐기는 차원인 ‘가망(可望)’의 개념을 현대회화 차원에서 변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그 공간이 땅이 아니라 상공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산수 체험과 차이를 보인다.
전통 산수에서의 유람이 완만한 이동과 관조적 체험을 의미했다면, 번지점프는 낙하와 반동, 속도를 수반하는 급진적 이동을 통해 도시 환경 속 인간들의 체험 방식과 실질적인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번지점프가 위아래로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시점을 확보하게 한다는 점은 동양의 자연인식에 해당하는 앙관부찰(仰觀俯察), 곧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현상을 위아래로 두루 살피며 통합적으로 관찰하는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수직적으로 보이지만 끊임없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번지점프의 운동 구조는 곽희가 말한 삼원법(三遠法)[平遠, 高遠, 深遠] 가운데 ‘심원(深遠)’의 공간 인식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게 한다. 번지점프를 통한 이러한 다양한 시각은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담긴 속살과 숨결을 산수의 구조 속에서 재맥락화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번지점프 형상은 도시를 신체적으로 관통하는 감각의 극대화된 순간과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을 동시에 포착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 산수 개념을 동시대적 감각 경험과 형상으로 전환시키는 회화적 매개로 작용한다. 이에 번지점프를 통한 도시산수 인식은 보다 구체적으로 산수 공간 속에서 소요(逍遙)하는 인간 군상들의 형상으로 확장하게 된다. 번지점프를 통해 표현된 화면 속에는 산수 공간을 유람하는 개별 인물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때로는 연인들이 함께 다정히 산을 오르는 장면도 포착된다. 화면 오른쪽 밑에 산에 놀러 나온 인물들을 작게 그려 산수와 인간의 공존을 그린 〈도시산수[야유회]〉 작품은 마치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를 현대 도시산수공간에 재해석한 느낌이 든다. 아울러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은 퇴락한 건물들의 흔적도 예술창작 대상이 된다. 이제 도시산수는 더 이상 관념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정서, 숨결이 스며든 살아 있는 ‘신진경산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산수 공간은 과거 은일(隱逸)의 삶을 추구하는 은사(隱士) 계층만이 향유하던 공간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 역시 함께 살아가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 지점에 박능생이 기존 산수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서사가 담겨 있다.
▲ 박능생, <도시산수[야유회]>
이제 도시와 산수의 이분법, 그리고 산수를 은일 지향적 삶과 연관된 특화된 공간으로 해석하던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난 박능생의 도시산수 창작 경향은, 곽희 화론의 마지막 단계인 ‘실제로 인간이 산수 속에 거처를 정하고 살아가는 삶’의 차원인 가거(可居)를 동시대적 차원에서 재해석되는 것으로 전개된다. 즉 박능생의 도시산수는 단순한 관념적 사의(寫意)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산수에서 도시의 풍경은 더 이상 외부 대상이 아니라 몸과 감각을 통한 현대인의 삶과 시간의 흔적이 화면에 스며든 재생성된 세계가 된다. 이런 점에서 박능생의 ‘도시와 산수가 묘합’된 도시산수는 단순한 시각적 풍경이 아니라, 몸의 경험이 체화된 육화(肉化) 차원의 ‘신진경산수’로 현현된다.
5. 나오는 말
도시와 자연을 상호 대립적인 범주로 파악하지 않고, 양자가 유기적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새로운 산수 질서, ‘신이형미도(新以形媚道)’ 차원의 ‘도시신진경산수’는 단순 현대 도시 풍경의 재현이나 전통 산수화의 형식적 변용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산수에 대한 인식론과 동시대 차원의 도시 경험을 결합함으로써 한국화가 현대 세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면서, 한국철학과 예술정신이 지향해온 ‘묘합적 전통’과 주체성 확립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의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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